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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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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최인호 작가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1983년) 직후부터 해외 배낭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배낭여행 1세대’ 작가다. 약 20년 동안 200개 이상의 도시를 여행했다. 이 책은 그 여행의 기록이자, 여행을 통한 그의 사유의 기록이다. 책의 제목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 〈산책〉에서 따온 것이다. 2011년에 나온 《나는 바람처럼 자유롭다》의 개정판이지만, 새로 추가된 부분도 많고, 기존의 내용도 거의 새로 씌어졌다. 여행을 바탕으로 씌어진 책이지만, 이 책은 여느 여행서와 다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행에 ‘사유의 숨’을 불어넣었고, 그 숨의 주제에 따라 이야기를 묶었다. 바라나시-파리-부에노스아이레스-마추픽추 여행은 ‘감각’이라는 주제로 묶었고, 브라쇼브-상트페테르부르크-사파 여행은 ‘사랑’을 주제로 묶었다. 히말라야-사막-낙안은 ‘만남’으로, 팜플로나-에기나-타지마할은 ‘삶과 죽음’으로, 리움-자이푸르-부다페스트는 ‘공간’으로, 델리-리우데자네이루-로렐라이-티티카카-융프라우는 ‘이동과 속도’로, 촐리스탄-카투만두는 ‘음식’으로, 그리고 이과수-바르셀로나는 ‘여행과 철학’을 주제로 묶었다. 가히 ‘여행의 인문화(人文化)’ 또는 ‘인문화된 여행’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여행이 낯섦과의 마주침이라고 말한다. 여행은 우리를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우리의 시공간을 온통 낯선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 낯섦이 있어야 우리 삶에 비로소 피가 돌기 시작하고 맥박이 뛰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여행은 느린 여행이고, 불편한 여행이다. 여행에서 속도는 사유의 시간을 밀쳐내며, 안락은 사유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의 여행에는 늘 문학과 철학, 시와 영화가 동행한다. 인도 여행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불려오고, 프랑스 여행에서는 보들레르와 헤밍웨이와 발자크가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여행에서는 보르헤스와 영화 〈여인의 향기〉가, 히말라야를 오를 때는 진각과 혜심의 선시(禪詩)가, 페루 여행에서는 네루다와 아폴리네르가 여행에 함께한다. 그밖에도 에밀 시오랑, 푸쉬킨, 파올로 쿠엘뇨, 고골, 하이네, 생텍쥐페리, 이생진, 류시화, 천상병, 연암 박지원 등 동서고금의 작가·사상가 들이 여기저기서 소환된다. 보는 여행, 먹는 여행이 보편화된 시대, 이 책은 읽는 여행, 사유하는 여행의 한 모범이 되어준다. 여행을 좋아하고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권한다. 저자 : 최인호 나는 여행을 한다. 그리고 여행을 그리워한다. 여행은 나를 다른 시간 속으로 데려간다. 나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이 된다. 그곳에 ‘나’는 없다. 50개 나라에서, 나는 단지 ‘누구’였을 뿐이다. 나는 문장 속으로도 여행을 떠난다. 타인의 문장 그리고 나의 단어들, 늘 그들이 그립다. 그 속에서도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모순 수업》 《부유하는 단어들》 《비와 바람의 기억》 《지독재독》 《1등급 공부 습관》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3》 《바람나다》 《문장의 무게》(근간예정) 나의 책들 속에서도 나는 단지 ‘누구’일 뿐이었다. 프롤로그 : 여행, 그 떨림에 관하여/ 9 1. 감각, 그 환상에 관하여 검은 개, 나의 또다른 이름 - 바라나시, 인도/ 19 카페, 우울하고 낭만적인 시간 - 파리, 프랑스/ 33 탱고, 하나를 향한 뜨거운 몸짓 -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50 탯줄, 지울 수 없는 흔적 - 마추픽추, 페루/ 68 2. 사랑, 그 가난함에 관하여 달. 그 우울함에 관하여 - 브라쇼브, 루마니아/ 86 눈, 그 뜨거움에 관하여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99 안개, 그 사라짐에 관하여 - 사파, 베트남/ 116 3. 만남, 그 우연에 관하여 수도승, 침묵을 횡단하는 사람 - 히말라야, 티베트/ 131 사막, 별, 바람 그리고 소년 - 사막. 이집트/ 139 손, 갈라진 삶의 그림자 - 낙안, 중국/ 153 4. 삶과 죽음, 그 축제에 관하여 광장, 디오니소스와 광기 - 팜플로나, 스페인/ 173 신, 언어에 갇힌 존재들 - 에기나, 그리스/ 188 타지마할, 삶과 죽음의 공존 - 타지마할, 인도/ 206 5. 낯선, 너무나 낯선 공간에 관하여 3프랑의 텐트, 낡거나 혹은 그리운 - 리움 외곽, 프랑스/ 222 짐칸 침대, 불편하거나 혹은 편안한 - 자이푸르행 기차, 인도/ 235 낡은 아파트 305호, 게으르거나 혹은 자유로운 - 부다페스트, 헝가리/ 246 6. 이동, 그 속도에 관하여 릭샤, 가벼운 그러나 가볍지 않은 - 델리, 인도/ 261 비행기, 거만한 그러나 인간적인 -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275 기차, 느린 그러나 아름다운 - 로렐라이, 티티카카 호수, 융프라우/ 290 7. 음식, 그 관계에 관하여 닭죽, 그 따뜻함에 관하여 - 촐리스탄, 파키스탄/ 304 라면, 그 친밀함에 관하여 - 카투만두, 네팔/ 311 8. 여행, 그 철학에 관하여 떠남, 그 떨림에 관하여 -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319 버림, 그 즐거움에 관하여 - 바르셀로나, 스페인/ 332 귀향, 그 편안함에 관하여 - 고향, 한국/ 345 에필로그 : 여행, 고단한 영혼의 휴식처/ 350 20년의 시간, 200개의 도시, 50개의 문학과 철학이 배낭으로 만나다 - 최인호 여행산문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 프롤로그 여행, 그 떨림에 관하여 방랑자로 산다는 것, 그것은 고독하면서도 황홀한 운명의 몸짓이다. 사막의 추위 속에서 별들의 따뜻함을 건졌고, 아마존 밀림에서 악어의 눈물과 마주쳤으며, 페루의 갈대 섬 위에서 떠도는 작은 섬이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원시 부족에게서 원초적인 사랑도 얻었다. 늘 외로웠으며, 이방인이었다. 어쩌면 나의 방랑은 안락한 삶의 방식을 거부한 벌, 고단한 유배의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곳에, 푹 꺼진 소파에 나의 육신과 영혼을 가두지 못한 죗값을 치렀던 것이리라. 하지만 천상에서 버려진 것이 결코 슬프지는 않았다. 천상의 규율을 따르는 것보다 바람 같은 영혼의 노예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랑의 삶은 결코 존재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직, 영혼과 길의 방향에 구속될 뿐이다. 길이 열려 있는 쪽, 특히 작고 굽은, 낯선 길이라면 그곳은 방랑자들의 영혼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그 길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할지라도 그곳이 가지 못할 곳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방랑은 그 가운데에 존재한다. 갑작스런 변화들은 고요했던 영혼을 흔들고, 작은 가슴을 긴장감으로 요동치게 하며, 단정했던 머리칼을 미친 사람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런 상황들은 오히려 겉돌기만 했던 인생의 지루한 궤도를 버리고, 살아 있는 ‘진짜’ 속으로 영혼을 진입시킨다. 너무나 많은 생각과 보이는 것들이 나를 겁쟁이로 만들어버렸다면, 그것들을 지워버리고 그래서 나조차 잃어버릴 때, 마침내 방랑이 시작되고, 밖이 아닌 ‘진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그것만이 방랑의 유일한 조건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리고 더 큰 우주를 얻었다. 방랑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선물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는 《구도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지의 땅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만 있을까요? 모험심을 가진 자에게는 모든 곳이 미지의 땅입니다. 하지만 나태하고 패배한 영혼에게는 광대한 분지와 북극성조차도 시시한 장소일 것입니다. (……) 미지의 땅으로 통하는 길은 당신이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이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이유입니다.” 방랑자의 길은 고독한 구도의 과정이다. 그들에게 신은 새롭게 만나는 ‘모든 것’들이다. 새로운 것, 그것은 익숙한 것에 갇힌 나를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화려함으로 충혈된 눈동자에 푸른 바다의 휴식을 주고, 일정한 리듬에 젖어버린 귀에 불규칙한 음표들을 선물하며, 단 것에만 길들여진 혀에 알싸한 고추의 맛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난 것들과의 대화는 방랑자의 ‘기도’가 되며,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신의 ‘선물’이 된다. 그래서 방랑자들은 그 시간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오직 그것에 순응할 뿐이다. 작은 존재에 불과한 방랑자의 길은 고독한 구도의 과정이다. 그들에게 신은 새롭게 만나는 ‘모든 것’들이다. 새로운 것, 그것은 익숙한 것에 갇힌 나를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낯선 것들 속에는 내가 보지 못한 또다른 우주가 있다. 하나의 작은 별에 불과한 나는, 광활한 우주가 써놓은 시를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우주가 써놓은 그 ‘낯선 시’는 이해가 아닌 교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만지기만 하면, 시는 그의 흰 속살을 기분 좋게 내비쳐준다. 그 시들을 만지는 순간, 나의 삶도 마법같이 새로운 것들로 변신한다. 속도가 사라지고, 한없이 게을러지며, 가던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아픈 상처는 꽃으로 피어난다. 나와 다른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은 나의 존재방식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우주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결코 갈 수 없는 곳도 아니다. 나의 길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그 옆길에, 당신이 동경하던 우주가 있을 것이며, 그 우주가 써놓은 수많은 시들이 별꽃으로 피어 있을 것이다. 방랑의 삶은 다른 은하계의 작은 별이 써놓은 한 편의 ‘시’임이 틀림없다. 방랑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어렵기만 한 그런 시 말이다. 나는 지금 그 시의 3행쯤을 걷고 있는 것이리라. 나의 영혼은 시의 낯선 단어들 위에서 비틀거리거나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완전함에서 불완전함으로 가고 있는 것이며, 평온에서 불안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의 3행이 지어놓은 여관, 쉼표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스위스의 양치기 소녀가,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인력거를 끌던 아저씨가, 사하라의 뜨거운 사막에서 검은 눈을 맞춘 히잡 쓴 여인이 함께 묵고 있다. 아마도, 영혼에 박혀 있는 타인의 시선과 도덕의 바퀴를 모두 제거할 때쯤이면, 마지막 시행 위를 걷게 될 것이다. 방랑은 런던에서 만난 안개와도 같은 것이다. 안개는 모든 것들을 꿈으로 만들어버리는 신비의 동화다. 꿈속에서 방황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쾌락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방랑자는 안개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개가 바람의 힘을 빌려 제멋대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핥고, 나무들을 감추고, 건물의 목을 감싸주고 있을 때, 안개의 이런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안개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꿈과 방랑자의 영원한 옷이 되기 위함이다. * 방랑자로 산다는 것, 그것은 고독하면서도 황홀한 운명의 몸짓이다. 사막의 추위 속에서 별들의 따뜻함을 건졌고, 아마존 밀림에서 악어의 눈물과 마주쳤으며, 페루의 갈대 섬 위에서 떠도는 작은 섬이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원시 부족에게서 원초적인 사랑도 얻었다. 늘 외로웠으며, 이방인이었다. 어쩌면 나의 방랑은 안락한 삶의 방식을 거부한 벌, 고단한 유배의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곳에, 푹 꺼진 소파에 나의 육신과 영혼을 가두지 못한 죗값을 치렀던 것이리라. 하지만 천상에서 버려진 것이 결코 슬프지는 않았다. 천상의 규율을 따르는 것보다 바람 같은 영혼의 노예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프롤로그) * 태양이 시간을 삼키는 죽음의 공간, 바라나시. 40℃를 넘는 무더위가 시체를 태우는 장작더미의 불꽃마저 집어삼킬 듯 덤벼든다. 하지만 바라나시의 화장터는 그런 뜨거운 태양을 거부하지 않는다. 주검을 태우는 불꽃도, 삶을 달구는 태양의 뜨거움도 모두 죽음으로 가는 삶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검게 흐르고 있는 갠지스 강 위로 삶과 죽음이 함께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빨래를 하는 아낙들, 그 옆에서 신성한 목욕 의식을 치르는 깡마른 순례자들, 그리고 사람의 시체를 물어뜯고 있는 물고기들, 타다 만 육신들…… 과연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이라 말해야 할까?(p.19) * 파리는 작은 도시다.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매혹적이다. 파리는 인간의 오감을 우울함으로부터 탈출시킨다. 특히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이 서로를 끌어안을 듯 뻗어 있는 샹젤리제 거리와 바토무슈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 짧지만 긴 몽테뉴 거리는 우리의 시각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게 만든다. 보들레르는 이 화려한 파리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p.33) 인간은 일찍이 본 일이 없는 그 엄청난 풍경의 카페, 우울하고 낭만적인 시간 어렴풋하고 먼 이미지가 오늘 아침에 나를 매혹한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움직임들 위로 영원한 고요가 감돈다. - 보들레르, 《악의 꽃》 중 〈파리의 꿈〉 중에서 * 리우데자네이루의 보석 같은 야경을 뒤로 하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기대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축구와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뜨거운 심장,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은 낡고 초라했지만 한낮의 태양은 송곳으로 찌르듯 따갑게 나를 반겨주었다. 축구와 탱고의 열정이 이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잉태되었음을 날씨는 소리없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심은 가로수 ‘하까란다’의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처음 만나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하까란다의 보랏빛 꽃잎들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마치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 뜨거운 시선으로 나의 온몸을 핥는 것처럼 나는 현기증이 난다.(p.50) * 나른한 봄날 오후. 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잉카 문명의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보게 되었다. 그 후 마추픽추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 새겨졌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멈춰선 나는 불쑥 배낭을 꾸렸다. 그리고 페루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마추픽추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채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그렇게 떠났다. 우연이었을까? 떠나기 며칠 전 나는 남미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시 〈산책〉에서 내가 떠나야 할 이유를 찾았다.(p.68)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발소의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승강기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발이,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 파블로 네루다, 〈산책〉 중에서 * 우리의 밤은 죽었다. 밤의 낭만과 추억도 함께 우리 곁을 떠나갔다. 우리의 밤은 낮의 종점, 끝이 없는 낮의 연장선 위에서 울고 있다. 현실을 벗어던진 나만의 꿈, 감성이 꽃처럼 자라는 광기의 시간이 살아 움직이는, 그런 밤은 더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아,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아름답게, 감성적으로 미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이. 우리는 밤의 은밀함과 그것이 주는 멜랑콜리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밤이 어둠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 별과 달이 밤을 지배하는 이곳, 루마니아의 작은 도시, 브라쇼브의 밤으로 나는 미풍처럼 들어왔다. 저 달이 나를 오롯이 비추고 있는 한, 나는 낯선 도시의 어둠과 시간 속에서 은밀함과 광기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만 같다.(p.88) * 저항점, 이곳은 영하 25℃라는 낯선 숫자와 며칠간 하늘이 토해낸 순백의 눈이 점령한 도시, 러시아의 노보시브리스크다. 이곳에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은 국방색의(군복무 시절 입었던 민무늬 빛바랜 초록색 군복) 낡은 기차,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긴 여행의 피곤함을 잠시 내려놓듯 숨을 고르며 정차해 있다. 그 품으로 사람들은 하나 둘 귀향의 짐보따리를 껴안은 채 기어들고 있다. 쏟아지는 흰눈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가족들의 머리 위로 수북이 내려앉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라’는 손짓도 무색하게 남겨진 가족들은 하얗게 눈으로 변해가고 있다.(……) 기차는 기적 소리도 없이, 짧은 안내 방송과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성에 낀 유리창 너머로 기차역이 점점 작아져간다. 그 역들이 하나의 점 혹은 흩날리고 있는 하나의 눈송이로 변할 때, 그곳은 드디어 ‘고향’이라는 ‘감각의 향수’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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